길 잃은 고교학점제, '평가'라는 심장을 수술하라

장밋빛 청사진에서 교육 현장의 악몽으로

길 잃은 고교학점제, '평가'라는 심장을 수술하라
장밋빛 청사진에서 교육 현장의 악몽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자신의 꿈을 따라 과목을 선택하며, 잠자던 교실이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찬 공간으로 거듭나는 모습. 몇 년 전 우리가 고교학점제를 통해 그렸던 희망찬 미래였다. 4차 산업혁명과 학령인구 감소라는 거시적 변화 속에서, 획일적 산업시대 교육모델을 넘어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겠다는 비전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시행 3년차를 맞은 교육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대가 아닌 절규에 가깝다. 학생들은 더 복잡한 입시 게임에 내몰리고, 교사들은 교육이 아닌 행정 업무에 소진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OECD '교육 2030'이 강조하는 학생 주도성과 변혁적 역량을 실현하겠다던 장밋빛 청사진은 어째서 교육 현장의 악몽이 되었는가.

 

문제의 본질: 절대평가 심장에 이식된 상대평가의 모순

문제의 본질은 명확하다. '절대평가(성취평가제)'라는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고교학점제에 '상대평가'라는 이질적인 장기를 억지로 이식하려 한 정책적 모순, 바로 그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등급 경쟁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성취평가제를 핵심 전제로 설계되었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점수 유불리를 떠나 소신껏 심화 과목에 도전하고, 새로운 지식 세계를 탐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안이 발표되면서 이 전제는 무너졌다. 대입 변별력 확보와 '성적 부풀리기'라는 오랜 불안감을 이유로, 모든 과목에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를 병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은 제도의 심장을 멈추게 한 치명적 실수였다. 학생들에게 "꿈을 따라 선택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모든 선택은 등급으로 서열화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들이민 셈이다. 이는 '객관적 서열 경쟁만이 공정한 선발'이라는 한국 사회의 강력한 통념에 교육 개혁이 굴복했음을 보여준다. 대학 서열화와 입시 경쟁이 교육의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두 가치를 어설프게 봉합한 정책은 진보적 요소를 경쟁 논리가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세 가지 구조적 파열: 선택의 왜곡, 교사의 소진, 공동체의 해체

 

첫째, 학생의 선택권이 전략적 계산으로 왜곡되었다.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다. 자신의 미래가 걸린 입시 앞에서 교육적 이상이 아닌, 가장 합리적인 '전략'을 택한다. 과목 선택은 진정한 흥미 탐구가 아닌, 수강생이 많아 좋은 등급을 받기 유리한 과목으로 쏠리는 '눈치 게임'으로 전락했다.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수강 인원이 적은 심화·전문 과목을 선택한 학생이 절대적 불이익을 받는다. 5등급제에서 상위 10%까지 1등급을 받을 수 있는데, 수강생이 9명 이하인 과목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도 원천적으로 1등급을 받을 수 없다. 도전적이고 깊이 있는 학습을 장려해야 할 제도가 오히려 이를 처벌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둘째, 교사들이 교육 전문가에서 행정 관리자로 전락했다.

이동수업 출결 관리, 수강신청과 학점 관리, 학생부 기재, 미이수자 보충 지도까지 행정 업무가 폭증했다. 한 교사가 여러 과목을 담당하는 경우가 급증하면서 수업 준비의 질이 저하되고, 교사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학생의 기초 학력을 보장하겠다던 '최소성취수준보장지도(최성보)' 제도는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에게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보충 지도에 따르는 막대한 부담과 학생 성적표에 '미이수'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압박 때문에, 일부 현장에서는 수행평가 점수를 부풀리거나 관련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는 등 학업 성취 기준 자체가 무력화되는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다. 이는 학업 기준을 유지해야 하는 교사의 교육적 양심과 모든 학생을 통과시켜야 하는 현실적 필요가 충돌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만들어냈다.

 

셋째, 학교 공동체가 해체되고 학생들의 불안이 증폭되었다.

매 시간 교실과 친구가 바뀌는 이동수업 환경에서 한국 고등학교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던 '학급'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학생들은 안정적인 또래 관계를 형성하고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워졌으며, 학교는 '함께 배우는 공동체'가 아닌 '혼자 경쟁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경쟁 완화를 목표로 했던 제도는 오히려 경쟁의 양상만 바꿨을 뿐이다. 좋은 등급을 받기 유리한 과목을 선점하고, 그 안에서 동료들을 이겨야 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과목 선택은 조기 진로 결정의 압박으로 이어지고, '선택을 잘못했다'는 불안이 학생들을 학기 내내 괴롭힌다.

 

미봉책을 넘어 심장 수술이 필요한 시점

2025년 9월 교육부가 교사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내놓은 개선안은 안타깝게도 핵심을 비껴갔다. 보충 지도 의무 시간을 학점당 5시간에서 3시간 이상으로 완화하고, 학생부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기재 분량을 1000자에서 500자로 축소하는 것은 고장 난 엔진을 그대로 둔 채 차체를 닦는 격이다. 교원 3단체가 한목소리로 "미봉책"이라 비판하는 이유다.

 

결정적으로, 상대평가와 절대평가 병기라는 핵심 쟁점은 이번 발표에서 완전히 빠져있다. 교육부는 이 문제를 국가교육위원회 소관으로 넘기며 즉각적 해결을 회피했다. 문제의 심장인 '평가 제도의 모순'을 수술하지 않는 한, 어떤 처방도 임시방편에 그칠 뿐이다.

 

이러한 한계는 한국 교육 거버넌스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한다. 교육부가 독점했던 정책 권한이 국가교육위원회와 분점되면서, 집행을 책임지는 교육부는 근본 원인을 직접 수정할 수 없고, 국교위는 장기적 의사결정 구조로 인해 즉각 대응이 어려운 이원화된 거버넌스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해외 성공 사례가 보여주는 명확한 해답

핀란드, 캐나다, 미국 등 성공적으로 학점제를 운영하는 교육 선진국 중 어느 곳도 우리처럼 기형적인 상대평가 혼합 모델을 채택하지 않았다.

 

핀란드는 고도로 훈련된 교사의 전문적 판단에 기반한 절대평가를 실시하며, 사회 전반적으로 교사를 공정하고 엄격한 평가 주체로 신뢰한다. 대입은 국가 졸업자격시험, 고교 졸업증명서, 대학별 자체 시험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 활용한다. 이는 고교 내신이 대입을 결정하는 유일 지표가 되는 것을 방지하며, 내신이 서열화 도구가 아닌 학습 과정의 기록으로 기능하게 한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졸업 요건으로 학점 이수 외에 사회봉사활동과 문해력 시험 통과를 요구하며, 평가는 압도적으로 절대평가(A~F 등급)를 사용한다. 대학들은 특정 상위 학년 과목 성적을 조합해 입학 사정 근거로 삼지만, 전국 단위 단일 서열화 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절대평가의 보편성, 다면적 전형, 교사 전문성에 대한 신뢰. 한국의 혼합 모델은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4단계 심장 수술: 체계적 개혁 로드맵

 

1단계: 전면적 절대평가로의 단계적 전환

모든 문제의 뿌리인 평가 제도를 수술하는 것이 개혁의 출발점이다. 선택과목부터 시작해 전 과목으로 확장하되, 국가 수준 성취기준을 정교화하고 교사 평가 전문성 연수를 의무화해야 한다.

 

'성적 부풀리기' 우려는 명확한 국가 수준 성취 기준, 교사의 평가 역량 강화, 그리고 개별 등수가 아닌 성취수준별 분포와 상세한 과목 이수 이력을 대학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최근 교육부 장관과 국가교육위원장이 2032학년도 대입을 목표로 절대평가 전환을 장기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긍정적 신호다.

 

2단계: 교사에게 시간을 되돌려주는 행정 재설계

학교 단위 '교육과정지원팀'을 정례화해 수강신청, 학점·출결 관리 같은 비본질적 업무를 전담시키고, 정규 교원을 확충해 다과목 부담을 줄여야 한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문서가 아니라 좋은 시간 배분에서 탄생한다. 교사가 수업과 평가, 상담에 몰입할 때 학점제의 의도는 비로소 교실에서 구현된다.

 

3단계: 학생 선택 역량의 체계적 지원 인프라 구축

학생의 '선택권'은 '정보에 기반한 선택'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이어지는 진로·학업 설계 코칭을 표준화하고, 학교 내 '진로교육과정위원회'가 담임·교과·전문상담교사를 연결해 학생 개별 맞춤 지원을 하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진로 탐색과 학업 계획 수립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보장하고, 고교 교육과정과 대학 전공, 미래 직업을 연결하는 구체적 도구를 제공해야 한다. 재이수와 보충은 낙인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선택의 실패를 학습의 자산으로 반전시키는 장치가 있어야 진짜 자율이 가능하다.

 

4단계: 대입 선발 체계의 근본적 재구조화

고교학점제는 대입 제도라는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홀로 성공할 수 없다. 수능을 전 과목 절대평가로 전환하여 자격고사화하고, 고차원적 사고력을 평가할 수 있는 서·논술형 문항을 확대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대학이 단순 내신 등급에 의존하는 대신, 학생의 과목 이수 내역, 성취도, 학교의 교육과정 특성 등을 종합 평가하는 다면적·질적 평가 역량을 갖추도록 신뢰하고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고교는 '교육'에, 대입은 '선발'에 각자 집중하도록 역할을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

 

철학적 선언을 넘어 구조적 혁신으로

고교학점제는 단순한 학사 운영 제도가 아니라, 우리 교육이 '경쟁'에서 '성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철학적 선언이어야 한다. 하지만 철학적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철학을 뒷받침하는 구조적 정렬(structural alignment)이 필요하다.

 

학점제의 목적이 '학생 성장의 기록'이라면, 그 기록을 서열화 도구에서 과감히 분리해야 한다.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하여 '성장과 성취의 기록'으로 만들고, '선별' 기능은 재설계된 대입 제도로 이관함으로써, 고등학교가 비로소 교육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이 개혁의 최종 목표다.

 

그 정렬 위에서야 학생의 선택은 입시 전략이 아니라 진정한 배움이 되고, 교사의 평가는 관료적 업무가 아니라 전문성이 된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역사적 책임

이제 공은 국가교육위원회로 넘어갔다. 더 이상 좌고우면하며 현장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국교위는 다음과 같은 단계적이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즉각적 조치: 고교 내신을 전면 절대평가로 전환하기 위한 공식적 사회적 숙의 과정을 즉시 시작하고, 2032학년도 대입 개편을 목표로 구체적 실행 방안과 신뢰도 확보 장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병행 과제: 절대평가 전환 논의와 동시에, 고교 내신 등급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대입제도 설계를 위한 다개년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해야 한다. 수능의 자격고사화 및 서·논술형 문항 도입, 대학의 학생부 종합평가 역량 강화 지원이 포함되어야 한다.

 

현장 안정화: 근본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현장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온라인학교 및 공동교육과정의 획기적 확대, 모든 고등학교에 행정 지원 전담팀 구성을 위한 예산 지원 등 즉각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고교 내신을 전면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용기 있는 결단만이 길 잃은 고교학점제를 살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선택권'과 '성장의 기회'를 돌려주는 유일한 길이다.

 

작은 분리가 가져올 큰 변화

결국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우리는 고교를 무엇을 위해 운영할 것인가. 학생의 잠재력을 확장하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지금의 혼합 평가 체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고교학점제를 정상화하는 과업은 기술적 제도 보완을 넘어선다. 이는 대학입시 제도라는 거대한 관성과 정면으로 맞서고, 교사와 학교를 교육 전문가로서 신뢰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용기 있는 정치적 결단이다. 부분적 수정이나 임시방편은 혼란을 연장시킬 뿐이다.

 

교육개혁은 선언이 아니라 치밀한 설계이자 일관된 실행이다. 그 시작은 간단하다. 학생의 성장 기록을 서열의 사다리에서 떼어내는 것. 그 작은 분리가 우리 교육을 다시 앞으로 움직이게 할 첫 걸음이다.